엔비디아에 도전하는 AMD, 한국의 문을 두드리다
AMD의 리사 수 회장이 7개월 만에 다시 서울에 왔습니다. 10월 7일 하루 일정이 그의 방한 목적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오전에는 정부와 국내 AI 스타트업들을 만났고, 오후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수장들과의 회동이 이어졌으며, 용산에서는 게이머들 앞에 섰습니다. 엔비디아를 추격하는 AMD에게 한국은 이제 메모리를 사 오는 곳이 아니라, 함께 진을 치는 동맹국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전: "개방형 생태계" 선언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라운드테이블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리벨리온, 퓨리오사AI, 딥엑스, 모빌린트, 망고부스트, 파두, 업스테이지 같은 국내 AI 반도체·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모였습니다. 리사 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개방형 생태계의 열렬한 신봉자라고 소개하며,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을 넓히겠다고 했습니다.
핵심 의제는 '이기종 AI 컴퓨팅'입니다. AMD의 CPU와 GPU에 한국이 만든 NPU(신경망 처리 칩)를 결합한 인프라를 국내에서 먼저 실증하고, 그 결과를 전 세계에 내놓을 표준 모델로 키우겠다는 구상입니다. 지난 7월 정부와 AMD가 맺은 협력 약속의 후속 조치이기도 합니다. 정부 측도 AI 경쟁이 학습에서 추론으로 옮겨 가는 만큼, 한 종류의 칩에만 기대지 않는 유연한 컴퓨팅이 중요해졌다고 화답했습니다. 여기에 AMD의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플랫폼 ROCm 생태계에 국내 기업들이 참여하는 길도 논의됐습니다.
한국에 대한 투자 약속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연내에 AI 연구센터를 세우고 연구원 수백 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 서울대학교 AI연구원과의 협력, 망고부스트와 손잡은 클라우드 인프라 구축이 그 내용입니다. 네이버클라우드에는 차세대 GPU 접근권을 주고 소프트웨어 최적화를 함께 추진하는 협력도 진행 중입니다.
오후: HBM4와 삼성·SK하이닉스
오후 일정에서 시장의 관심이 쏠린 건 메모리였습니다. 리사 수는 차세대 AI 가속기 '인스팅트 MI455X'와 이를 랙 단위로 묶은 '헬리오스' 시스템의 출하를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HBM4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원을 받았다고 직접 언급했고, 두 회사와의 협력을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파트너십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다만 회사별 공급 물량과 비중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메모리 공급이 빠듯하다는 점도 인정했습니다. 파트너들에게 공급을 늘려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고객이 메모리를 아껴 쓰도록 돕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삼성전자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협력 가능성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 뒀지만, 구체적인 계약을 밝힌 단계는 아닙니다. 리사 수는 AMD가 2015년 세계 최초로 HBM을 실제 제품에 적용한 회사라는 이력까지 언급하며, 메모리와의 오랜 인연을 강조했습니다.
저녁: 게이머들 앞에선 다른 얼굴
같은 날 용산에서는 'AMD 게이머 데이'가 열렸습니다. 리사 수는 한국 게이머들을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수준 높은 이용자들이라고 치켜세우며, AI와 게이밍을 결합하는 방향을 이야기했습니다. 오전에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생태계를 말하던 최고경영자가, 저녁에는 소비자들 앞에서 직접 제품을 이야기한 겁니다. 반도체 회사의 대표 일정이라기보다, 하나의 시장을 통째로 설득하러 온 사람의 동선에 가까웠습니다.
왜 하필 한국인가
이 풍경이 흥미로운 건 반도체 업계의 힘 관계가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AI 가속기의 성능은 이제 어떤 메모리를 붙이느냐에 크게 좌우되고, 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가 전 세계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칩을 설계하는 쪽이 주문하고 메모리 회사가 맞추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핵심 메모리를 확보하려는 쪽이 먼저 찾아오는 시대가 된 겁니다. 리사 수의 빽빽한 서울 일정이 그 변화를 상징합니다.
CUDA의 벽 앞에서
AMD의 전략은 엔비디아와 정반대 방향을 향합니다. 엔비디아는 CUDA라는 강력한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개발자들을 붙잡아 두는 닫힌 성을 쌓았습니다. AMD는 그 성을 정면으로 부수는 대신, 문을 열어 동맹을 모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오픈소스 ROCm으로 풀고, 하드웨어는 각 지역 파트너의 칩과 결합하는 식입니다. 한국 기업들에게는 엔비디아 중심 생태계에서는 닿기 어려웠던 글로벌 시장의 문이 열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선언과 실증은 다른 일입니다. 이기종 인프라가 실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고, ROCm 생태계가 개발자들에게 CUDA의 대안으로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7개월 간격으로 서울을 찾아 정부, 대기업, 스타트업을 하루에 모두 만나는 최고경영자의 동선은, 한국이 AI 반도체 지도에서 어떤 자리로 올라섰는지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합니다.
데이터 출처: 머니투데이, 블로터, 글로벌이코노믹, 코리아헤럴드 등 2026년 10월 7일 공개 보도를 종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