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변호사가 없는 로펌: 법률 AI가 바꾸는 일의 구조


 

신입 변호사를 뽑지 않는 로펌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던 일을 빼앗은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이 없는 자리로 설계된 로펌 이야기입니다.

로펌이라고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시나요. 경력 많은 파트너 변호사 아래에 젊은 변호사들이 줄지어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판례를 찾고, 계약서 초안을 다듬는 모습이 익숙합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이 풍경 자체를 뒤집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신입 변호사를 아예 두지 않는 로펌이 등장하고, 대기업 법무 조직은 사람을 줄이는 대신 새로운 AI 직책을 만들고, 변호사와 AI가 한 몸처럼 붙어 일하는 회사가 투자까지 받았습니다. 오늘은 법률 AI가 로펌의 일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들로 살펴보겠습니다.

1. 신입이 없는 로펌, 피어슨 퍼디낸드

2024년 1월에 출범한 미국의 로펌 피어슨 퍼디낸드(Pierson Ferdinand)는 조금 독특한 회사입니다. 출범 당시 기존 로펌에서 130명이 넘는 변호사가 한꺼번에 옮겨 와, 미국 로펌 역사상 손꼽히는 규모의 출발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사무실 없이 전 세계에 흩어져 일하는 분산형 로펌인데, 2026년 9월 말 파트너 변호사가 300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습니다. 출범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회사가 이 정도 규모로 컸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눈길을 끄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이 로펌에는 신입 변호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회사 측은 이를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트너만으로 구성된 로펌이며, 신입 변호사와 신입 교육이 설계상 없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원래 신입 변호사가 맡던 자료 조사나 문서 검토 같은 일은 AI가 대신합니다. 공동회장은 창립 때부터 AI와 기술이 업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그 덕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경력이 짧은 구성원도 실무 5년 차 수준이라고 하니, 사람을 줄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베테랑과 AI만으로 회사를 짠 셈입니다.

물론 AI가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로펌은 업무 약관에 AI 사용 규칙을 못 박아 뒀습니다. 어떤 AI 도구를 쓸 수 있는지 정해 두고, AI가 만든 결과물은 변호사가 정확성과 편향을 직접 검토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책임은 끝까지 사람이 진다는 원칙을 문서로 남긴 것이죠.

성과도 숫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로펌의 2025년 전 세계 청구 매출은 1억 2,600만 달러로, 전년보다 61퍼센트 늘었습니다. 변호사에게 시간당 청구 실적을 강요하지 않는 구조인데도 이 정도 성장세를 보인 것입니다. 전통적인 대형 로펌이 파트너 한 사람 아래 신입 여러 명을 붙여 수익을 내는 방식을 써 왔다면, 피어슨 퍼디낸드는 그 사다리의 아래 칸을 AI로 바꾼 모델이 실제로 통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그 자리를 채운 AI, 하비

피어슨 퍼디낸드가 신입의 일을 맡긴 도구 중 하나가 법률 AI 하비(Harvey)입니다. 2022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전직 소송 변호사와 AI 연구자가 함께 만들었고, 법률 리서치와 계약 분석, 문서 초안 작성처럼 변호사 업무에 꼭 맞춘 AI 플랫폼을 제공합니다.

성장 속도가 대단합니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미국 대형 로펌 100곳 가운데 80퍼센트가 하비를 쓰고 있고, 고객사는 3,000곳을 넘었으며, 대기업 사내 법무팀으로도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연간 반복 매출은 4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2026년 9월에는 5억 5,0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가 155억 달러로 평가받았습니다. 반년 전만 해도 110억 달러였으니, 법률 AI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커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입 변호사의 일을 대신한다는 그 AI가, 이제는 법률 업계가 무시할 수 없는 인프라가 된 셈입니다.

3. 디즈니의 선택, 줄이는 조직과 새로운 직책

대기업 사내 법무 조직에서도 비슷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디즈니는 2026년 9월 중순, 법무 부문 책임자가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를 통해 이 부문이 지금보다 훨씬 작은 조직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일부 업무는 자동화하고, 단순한 문의는 셀프서비스로 돌리고, 외부 서비스를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엿새 뒤, 디즈니는 새로운 채용 공고를 냈습니다. 직책 이름은 'AI 인에이블먼트 및 법률 엔지니어링 디렉터'입니다. 계약 검토와 법률 리서치 같은 법무 업무 흐름을 AI로 다시 설계하고, AI에 쓴 돈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내는지 측정하며, 변호사들이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법학 학위와 변호사 자격, 10년 이상의 경력을 요구하는 고위직으로, 보도된 연봉 상한은 약 24만 8,800달러에 이릅니다.

감축되는 법무 인력의 구체적인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을 줄이겠다는 메모와 AI 전문가를 뽑겠다는 공고가 같은 주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법무 조직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는지는 충분히 읽힙니다. 디즈니 최고재무책임자가 올해 실적 발표에서 "기술로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법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시대가 된 것입니다.

4. 아예 AI와 함께 태어난 로펌, 아르세우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례도 있습니다. 2026년 10월 1일, 아르세우스(Arceus)라는 회사가 1,7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회사는 AI 도구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로펌 그 자체입니다. 면허를 가진 변호사와 자체 소프트웨어, AI 에이전트를 결합해 기업의 계약 검토와 협상을 정해진 요금으로 제공합니다.

핵심은 '카운슬OS(CounselOS)'라는 운영체제입니다. 회사가 평소 쓰는 이메일과 메신저, 고객 관리 시스템과 연결돼 계약의 맥락을 모으고, 쟁점을 짚어 내고, 알맞은 변호사에게 일을 배정한다고 합니다. 고객은 익숙한 메신저 창에서 바로 계약서를 올려 검토를 맡길 수 있습니다. 표준 계약 검토를 며칠에서 몇 주 걸리던 것에서 몇 시간으로 줄이고, 8시간 안에 검토를 마치지 못하면 무료로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내걸었습니다.

창업자는 변호사가 아니라 기술 업계 출신입니다. 그는 시간당 요금을 받는 기존 방식이 일을 오래 끌수록 로펌에 유리한 구조라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AI 네이티브 로펌이라는 이름에는, 도구를 덧붙인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를 AI와 함께 다시 설계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5. 숫자가 보여 주는 간극

이런 변화가 모든 곳에서 순조로운 것은 아닙니다. 톰슨로이터가 전 세계 법률, 세무, 회계 등 전문직 종사자 1,800명을 조사한 'Future of Professionals 2026'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91퍼센트가 자신의 조직이 AI가 해낼 수 있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전문직의 74퍼센트가 매주 AI 도구를 쓰고 있지만, 조직 차원의 준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AI에 쓴 돈이 얼마나 효과를 냈는지 체계적으로 재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영국 로펌 시장을 분석한 한 보고서에서는 그런 성과를 지표로 모아 보는 곳이 18퍼센트뿐이라고 전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분의 1이 조직이 승인하지 않은 AI 도구를 몰래 쓰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현장의 변호사들은 이미 AI 없이는 일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는데, 회사의 규칙과 관리는 아직 그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 모습입니다. 도구는 빠르게 들어오는데, 정작 그 도구가 회사에 어떤 이익을 주는지 확인하는 일은 뒤처져 있는 셈입니다. 피어슨 퍼디낸드나 아르세우스처럼 구조 자체를 바꾼 곳과, 도구만 들여놓고 헤매는 곳의 간격은 앞으로 더 벌어질지 모릅니다.

물론 물음표도 남습니다. 신입 변호사가 선배의 일을 곁에서 보며 배우는 과정이 사라지면, 다음 세대의 베테랑은 어디에서 길러지느냐는 질문입니다. 피어슨 퍼디낸드는 처음부터 경력자만 모은 회사라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업계 전체가 이런 구조로 기울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도제식으로 사람을 키워 온 전문직의 오랜 방식과, AI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방식 사이에서 어떤 균형이 만들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마무리

오늘 살펴본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법률 AI는 이제 변호사를 돕는 보조 도구를 넘어, 조직이 사람을 어떻게 배치하고 일을 어떻게 나눌지를 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신입 없는 로펌, AI 전담 디렉터, AI 네이티브 로펌은 모두 그 변화의 다른 얼굴입니다.

그렇다고 변호사라는 직업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뀐 것은 일의 구조입니다. 반복적인 조사와 검토는 AI가 맡고, 사람은 판단과 책임, 그리고 고객과의 신뢰를 맡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있습니다. 법조계에서 시작된 이 재편이 다른 전문직으로 어디까지 번질지, 지켜볼 만한 대목입니다.

데이터 출처: Pierson Ferdinand 공식 보도자료(2026년 9월 29일), Artificial Lawyer(Pierson Ferdinand·Arceus·The AI Value Gap 보도), Harvey 케이스 스터디, The Hollywood Reporter 디즈니 법무 부문 보도 및 디즈니 채용 공고(2026년 9월 24일), 톰슨로이터 'Future of Professionals 2026' 보고서, CNBC Arceus 보도(2026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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