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엔진이 AI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캡콤 REX 프로젝트
게임을 직접 만드는 AI가 아니라, 개발자 옆에서 함께 코드를 짜는 엔진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1. 도쿄에서 열린 캡콤의 기술 행사
2026년 10월 2일, 도쿄 아리아케에서 캡콤의 자체 기술 행사 '캡콤 오픈 컨퍼런스 RE:2026'이 열렸습니다. 일반 팬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개발자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기술 컨퍼런스였고, 첫 강연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주제는 "차세대를 향해 RE ENGINE을 더욱 진화시키는 'REX' 프로젝트의 전망과 미래". RE ENGINE 개발팀의 프로그래머 이시다 사토시가 무대에 올라, 캡콤의 간판 엔진이 앞으로 어디로 가려는지 설명했습니다.
RE ENGINE은 2014년부터 개발돼 2017년 '바이오하자드 7'로 데뷔한 뒤 '몬스터 헌터'와 '스트리트 파이터'까지, 캡콤의 주요 게임 약 30편을 떠받쳐 온 자체 엔진입니다. 캡콤의 통합보고서에 따르면 지금은 캡콤이 내는 사실상 모든 타이틀이 이 엔진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핵심 자산인 셈입니다. 그 엔진의 다음 단계로 제시된 것이 REX 프로젝트입니다. 강연에서는 이 엔진을 앞으로 'AI 생성 게임 엔진'으로 진화시키겠다는 목표가 소개됐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2. 'AI 생성 게임 엔진'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
'AI 생성 게임 엔진'이라고 하면 AI가 그래픽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어 게임을 뚝딱 완성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실제로 해외 매체의 첫 보도가 비슷한 뉘앙스로 나갔다가 번역이 잘못됐다는 논란이 일었고, 제목이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강연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림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향은 AI가 게임 속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엔진이 아니라, AI가 엔진의 코드를 이해하고, 새 코드를 생성하고, 개발 파이프라인 안에서 개발자와 함께 일하는 엔진입니다. 강연자의 표현을 빌리면 "AI와 함께 게임을 만드는 미래"에 가깝습니다.
이 방향은 캡콤의 기존 입장과도 이어집니다. 캡콤은 2026년 3월 주주총회에서 AI가 생성한 에셋, 즉 그래픽이나 사운드 같은 결과물을 게임에 넣지는 않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집니다. 대신 개발 과정의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로는 AI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입장이었고, REX는 정확히 그 후자에 속하는 프로젝트입니다.
AI가 코드를 짜는 동료가 되려면 넘어야 할 벽도 있습니다. 오래된 게임 엔진은 보통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와 도구가 뒤섞여 있어서, 사람도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AI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강연에서는 엔진의 시스템들을 하나의 공통된 언어 기반으로 정리해, AI가 코드를 읽고 쓰기 쉬운 형태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함께 언급됐습니다. 어떤 언어로 통일하겠다는 것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세부 사항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AI를 손님처럼 초대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같은 사무실에 앉히겠다'는 방향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일부 분석가들은 이 표현을 '생성형 AI로 돌아가는 엔진'이라기보다 'AI 시대에 맞게 다시 설계되는 엔진'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이름만 보고 판단하면 실제 발표보다 한참 앞서 나가게 되는 셈입니다.
3. REX는 새 엔진이 아니다
한 가지 짚어 둘 점은 REX가 완전히 새로운 엔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REX라는 코드네임은 2023년 10월에 처음 공개됐고, 'RE neXt ENGINE'의 약자입니다.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대신, 지금 쓰고 있는 RE ENGINE의 기반 기술을 하나씩 갈아 끼우며 단계적으로 진화시키는 방식입니다.
구성 요소는 여섯 가지로 소개됐습니다. 데이터 형식을 표준화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RE:Dox, 로그를 ID 기반으로 바꿔 데이터량을 줄이는 RE:Log, 개발 도구를 가볍고 빠르게 만드는 RE:UI, 게임플레이 로직을 그림으로 짜면 표준 코드로 자동 변환해 주는 RE:Flows, 수많은 캐릭터와 오브젝트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새 실행 기반 RE:Runtime, 그리고 그 안쪽의 최적화 레이어인 RE:C++입니다.
말만 앞선 계획은 아닙니다. 행사 당일, 구성 요소 중 하나인 RE:Dox가 오픈소스로 실제로 공개됐습니다. 캡콤의 공식 기술 조직이 운영하는 저장소에 올라왔고, 역직렬화 성능이 기존 표준 라이브러리보다 최대 약 2.84배 빠르다는 측정 결과도 함께 제시됐습니다. 일부 기반 기술을 오픈소스로 푸는 이유 중 하나로 'AI가 학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AI가 엔진의 코드를 읽고 쓰려면, 먼저 코드와 데이터가 AI가 다루기 좋은 모습으로 정리돼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여섯 가지 구성 요소가 향하는 곳도 결국 같습니다. RE:Dox와 RE:Log는 데이터가 오가는 방식을 단순하고 빠르게 다듬고, RE:UI는 개발자가 매일 만지는 도구의 반응 속도를 높입니다. RE:Flows는 프로그래머가 아닌 개발자도 게임의 규칙을 직접 짜 넣을 수 있게 하면서 그 결과물을 정식 코드로 바꿔 주고, RE:Runtime과 RE:C++는 커진 게임 세계를 버벅임 없이 돌리는 뼈대입니다. 그리고 이 뼈대가 정돈될수록, 그 위에서 일하는 AI도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엔진을 멈춰 세우고 갈아엎는 대공사가 아니라, 지금 돌고 있는 엔진을 한 부위씩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방식이라 현재 개발 중인 게임들과도 나란히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현실적인 지점입니다.
4. 왜 하필 엔진부터 바꾸는가
캡콤이 엔진 차원에서 이런 변화를 시작하는 배경에는 현실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강연에서 제시된 과제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게임의 규모가 너무 커졌습니다. 데이터량이 늘면서 단순한 작업 하나에도 시간이 걸리고, 만들고 확인하는 반복 과정이 개발 속도 전체를 늦춥니다. RE ENGINE이 처음 나온 2017년 이후 게임 한 편에 들어가는 에셋 수가 5배 이상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둘째, 쓰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RE ENGINE을 사용하는 개발자는 2,000명을 넘어섰습니다. 해외 스태프와 다른 엔진 출신 개발자까지 함께 쓰다 보니, 도구와 문서가 누구나 접근하기 쉬워야 하고 여러 언어를 지원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습니다.
셋째, AI를 일하는 방식 안에 처음부터 넣자는 판단입니다. 완성된 엔진에 AI 기능을 나중에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코드와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AI와 협업하기 좋게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같은 행사에는 화면과 소리를 보고 판단하며 게임을 자동으로 플레이해 품질을 검사하는 기술을 다룬 별도 강연도 있었습니다. 게임이 스스로 테스트 플레이를 하는 모습은 REX가 그리는 방향과도 닿아 있지만, 엄밀히는 독립된 세션에서 발표된 별개의 기술입니다. 10년 치 개발 기록과 로그를 거대언어모델로 검색할 수 있게 만든 내부 도구를 소개한 강연도 따로 있었습니다. 그만큼 캡콤 안에서는 여러 팀이 각자의 자리에서 AI 활용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5. 다른 회사들과는 조금 다른 결
게임 업계에서 AI 도입이 화제가 된 것이 캡콤만의 일은 아닙니다. 다만 회사마다 힘을 주는 자리가 꽤 다릅니다.
유비소프트는 게임 안쪽의 실험이 두드러집니다. NPC 대사의 초안을 써 주는 도구를 공개한 데 이어, 생성형 AI로 움직이는 NPC 시제품과 음성으로 반응하는 AI 동료 캐릭터 데모를 잇달아 선보였습니다. 플레이어가 게임 안에서 만나는 존재를 AI로 바꾸는 방향입니다.
EA는 규모와 속도를 앞세웁니다. 최고경영자가 개발 과정의 약 60%가 생성형 AI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스포츠 게임의 경기장 제작 기간이 6개월에서 6주로 줄었다는 사례도 공개했습니다. 한 대학 미식축구 게임에서는 경기장 150곳과 선수 얼굴 11,000개를 AI와 머신러닝으로 만들었고, 회사 전체의 개발 효율을 30%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비해 캡콤의 REX는 플레이어의 눈에 보이는 곳이 아니라, 개발자들이 매일 여는 도구와 엔진의 속을 바꾸는 프로젝트입니다. 화려한 데모보다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엔진은 한 번 바꾸면 그 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게임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이런 발표가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더 무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무리
REX의 AI 관련 내용은 아직 '전망과 미래'라는 강연 제목 그대로, 완성된 기능이 아니라 방향 제시입니다. 실제로 손에 잡히는 성과는 RE:Dox 같은 기반 기술의 공개부터 차근차근 쌓이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이 발표가 흥미로운 이유는, AI를 대하는 한 대형 게임 회사의 태도가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게임에 넣는 것에는 선을 긋고, 대신 개발자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AI와 함께 바꾸겠다는 선택입니다. 앞으로 나올 캡콤의 게임들이 어떤 속도와 완성도로 등장할지, 그 배경에 이 엔진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게임을 즐기는 입장에서는 화면 뒤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결국 우리가 손에 쥐는 게임의 모습은 이런 보이지 않는 선택들 위에서 결정됩니다.
데이터 출처: 캡콤 공식 행사 페이지(CAPCOM 오픈 컨퍼런스 RE:2026), 캡콤 공식 GitHub(RE:Dox 저장소), 일본 게임 업계지 gamebiz 보도와 이를 인용한 AUTOMATON·VGC 등 해외 매체 보도(2026년 10월 2일에서 3일), 캡콤 IR 통합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