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설계한 단백질 31만 개, 전갈 독에 붙은 건 17개였다 — 클로드의 해독제 첫걸음


 

전갈에 쏘이는 일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앤트로픽이 연구 배경으로 인용한 수치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매년 120만 명 이상이 전갈에 쏘이고 3,2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습니다. 피해는 의료 시설에 닿기 어려운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집중됩니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소외 열대질환'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돈이 되는 시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해독제는 오래된 방식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말에게 전갈 독을 조금씩 면역시킨 뒤, 그 혈액에서 항체를 정제하는 방식입니다. 만드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비싼 데다, 효과가 닿는 독의 종류도 일부에 그칩니다. 전갈의 종이 다르면 독의 성분도 달라서, 어느 지역의 해독제가 다른 지역의 독에는 듣지 않는 일도 흔합니다. 종류마다 따로 만들어야 하는 약을,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구조인 셈입니다.

지난 10월 20일, AI 회사 앤트로픽이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하나 발표했습니다. 자사의 AI 클로드가 전갈 독에 달라붙는 단백질, 이른바 '바인더'를 직접 설계했고, 그중 일부가 실제 실험실에서도 독에 붙는 것이 확인됐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간극이 하나 보입니다. AI가 설계한 단백질은 31만 개가 넘는데, 실험실에서 실제로 붙은 건 17개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적었을까요. 그리고 고작 17개가, 왜 그래도 의미 있는 결과로 평가받는 걸까요.

먼저 클로드가 한 일부터 보겠습니다. 앤트로픽 연구팀은 사내 연구 환경인 '클로드 사이언스'에서 내부 연구용 클로드에게 과제를 맡겼습니다. 처음에 준 지시는 한 번뿐이었고, 첫 하루는 그 지시만으로 혼자 돌았습니다. 이후에 사람이 방향을 잡아 준 후속 지시가 네 번 있었고, 그렇게 약 64시간 동안 클로드는 대체로 혼자 일했습니다. 12가지 단백질 설계 도구를 오가며 설계안 318,484개를 만들었고, 설계와 독을 짝지은 553,052개 쌍을 접힘 구조까지 따져 가며 걸러 냈습니다. 이 계산에만 GPU 시간으로 약 1만 시간 규모가 들었습니다. 사람이 밤을 새워도 몇 년이 걸릴 분량의 검토를, 주말 남짓한 시간에 밀어 넣은 셈입니다. 어떤 도구를 골라 쓰고, 나온 결과를 보고 다음 설계를 어떻게 고칠지까지, 그 판단의 흐름도 클로드가 스스로 이어 갔다고 앤트로픽은 설명합니다.

표적은 네 개 지역의 전갈 종에서 뽑은 신경독 다섯 종류였습니다. 멕시코 전갈의 Cn2, 브라질 전갈의 Ts1, 북아프리카의 AaH I과 AaH II, 중동의 LqhIII. 이 독들은 신경세포의 나트륨 통로를 공격해 몸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나트륨 통로는 신경 신호가 오가는 문 같은 것이라, 독이 여기에 달라붙어 문을 망가뜨리면 신호가 엉켜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하거나 마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독들의 해독은 결국 '독이 그 문에 닿기 전에 붙잡는 일'이 됩니다. 바인더, 그러니까 독에 먼저 달라붙어 독을 붙들 단백질을 설계한다는 발상이 여기서 나옵니다. 클로드는 각 독이 나트륨 통로에 붙는 바로 그 부위를 노렸고, 설계 방식도 세 갈래로 나눠 시도했습니다. 독 하나만 노리는 설계, 비슷한 독 계열을 묶어 노리는 설계, 그리고 다섯 종 전부를 한 번에 붙잡는 설계까지요.

왜 하필 전갈 독이었을까요. 독소는 표적이 분명합니다. 어떤 분자가, 어느 부위에 붙어, 무엇을 망가뜨리는지가 비교적 또렷하게 알려져 있죠. 반대로 기존 해법은 비싸고 느리고 지역마다 따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표적은 분명한데 해법이 낡아 있는 문제, AI 단백질 설계를 시험하기에 이만한 조건도 드뭅니다. 여기에 소외 질환이라는 사정까지 겹치면, 성공했을 때의 의미도 커집니다.

설계가 아무리 많아도 컴퓨터 안의 그림일 뿐이라, 진짜 시험은 실험실에서 시작됩니다. 클로드가 고른 180개에 연구팀이 클로드의 도움을 받아 고른 31개를 더해, 모두 211개를 실제로 만들었습니다. 합성과 측정은 Adaptyv Bio와 Twist Bioscience, 두 회사가 맡았습니다. 합격 기준도 이중으로 걸었습니다. 두 실험실 모두에서 결합 강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나와야 하고, 엉뚱하게도 사람의 단백질인 CLEC12A에는 붙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었습니다. 결합 강도는 해리상수라는 값으로 재는데, 숫자가 작을수록 단단히 달라붙는다는 뜻이고, 이번 기준은 두 곳 모두에서 1마이크로몰 이하를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험실을 두 곳으로 나눈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한 곳에서만 나온 결과는 우연이나 측정 환경의 차이일 수 있으니,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결과가 재현돼야 진짜로 인정하겠다는 거죠. 아무 데나 달라붙는 단백질은 약이 아니라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냉정했습니다. 기준을 통과한 건 211개 중 17개. 붙은 대상을 뜯어 보면 전부 독 하나에만 붙는 설계였습니다. Cn2용 7개, AaH II용 4개, AaH I용 4개, LqhIII용 2개. 여러 독을 동시에 붙잡으려던 설계는 단 하나도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독 하나만 노린 설계들의 성공률은 18퍼센트 수준으로, 앤트로픽은 이게 일반적인 단백질 설계 캠페인과 비슷한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31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실험실의 문턱 앞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확률로 대부분이 떨어져 나간 겁니다. 설계 화면 속에서는 완벽해 보여도, 실제 분자는 접히는 모양부터 결합의 미세한 각도까지, 계산이 놓치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17개 안에도 급이 있었습니다. 가장 강한 두 개, Cn2-B1과 Cn2-B2는 멕시코 전갈의 Cn2 독에 한 자릿수 나노몰 수준으로 아주 강하게 붙었습니다. 더 눈길을 끈 건 경쟁 실험 결과입니다. 이 두 단백질이 독에 붙는 자리가, 이미 알려진 중화 항체 LR이 붙는 자리와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화 항체와 같은 자리를 다툰다는 건, 독이 신경세포에 닿기 전에 가로막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다만 여기서 앤트로픽 스스로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세포 환경에서 실제로 독을 중화하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고, 해독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붙는 것과 막는 것은 다른 일이고, 그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멉니다.

앞으로 남은 길도 발표에 솔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건 실험실에서 만든 재조합 독 기준의 결합뿐입니다. 실제 전갈 독에서 뽑은 독소에도 붙는지 확인해야 하고, 신경세포에 전극을 대고 재는 패치클램프 실험을 거쳐, 그다음에야 쥐 실험으로 넘어갑니다. 안전성과 안정성,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지, 싸게 공급할 수 있는지는 또 별개의 산입니다. 외부 전문가들의 평가도 같은 결입니다. 스페인 국립암연구센터의 수사나 바스케스 토레스와 덴마크공과대학교의 티모시 젠킨스는 이 연구를 '유망한 첫 단계'로 평가하면서도, 바인더를 만든 뒤의 치료제 파이프라인이야말로 진짜 과제라고 짚었습니다.

그래도 17개가 중요한 이유는, 병목이 있던 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독에 붙는 단백질 후보를 찾는 일 자체가 긴 싸움이었습니다. 이번 실험은 그 후보 찾기를 AI가 64시간 만에 해치울 수 있음을, 실제 합성과 측정으로 검증해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설계 성공률이 확 뛰어오른 건 아닙니다. 달라진 건 속도와 규모입니다. 실패해도 금방 다음 31만 개를 설계할 수 있는 구조가 생긴 것이죠. 앤트로픽은 이번에 만든 211개 설계 전체와 결합 데이터를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 자체도 눈길을 끄는데, 금융 리서치 회사 시트리니 리서치가 '동기 있는 비전문가 집단이 AI 약물 설계로 진짜 의료 문제를 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져와 함께 진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31만 개 중 17개라는 숫자는 실패담이 아니라 성적표에 가깝습니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설계해도, 생명의 분자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한 번씩 직접 붙어 봐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까다로운 확인을 통과한 17개가, 전갈 독이라는 오래된 소외 질환에 처음으로 'AI가 설계한 후보'라는 새 출발선을 그었다는 것. 해독제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한참 멀지만, 첫걸음이라는 제목이 과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데이터 출처: 앤트로픽 공식 연구 발표 'Claude designs proteins that bind scorpion toxins'(2026년 10월 20일). 설계·검증 수치와 성공률, 한계에 대한 설명은 모두 이 발표 기준이며, 전갈 쏘임과 사망자 수는 앤트로픽이 배경으로 인용한 수치입니다. 세포 수준의 중화 여부와 동물 실험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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