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칩 주문이 2030년까지 밀렸다 — ASML 실적이 보여 준 병목
인공지능 칩이 모자란다는 말은 이제 뉴스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주, 그 부족함의 길이를 가늠할 수 있는 숫자가 두 회사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습니다. 칩을 만드는 기계를 파는 ASML과, 그 기계로 칩을 찍어 내는 TSMC입니다. 두 회사가 같은 주에 나란히 사상 최대급 실적을 내놓으면서, 한쪽에서는 2029년과 2030년 주문 이야기가, 다른 한쪽에서는 다음 분기 전망 상향이 나왔습니다. 기록적인 숫자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입니다. 수요가 공급을 여전히 앞지르고 있고, 그 간격은 생각보다 천천히 좁혀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ASML부터 볼까요. 이 회사를 이해하려면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순서를 떠올리면 됩니다. 누군가 칩을 설계하고, 공장이 그 설계를 실리콘 판 위에 찍어 냅니다. 이때 회로를 새기는 핵심 공정이 노광이고, 가장 앞선 칩을 만들려면 극자외선, EUV 노광장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EUV 장비를 만드는 회사는 세계에서 ASML 한 곳뿐입니다. 삼성전자도, TSMC도, 인텔도 이 기계 없이는 최첨단 칩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ASML의 실적은 단순한 한 회사의 성적표가 아니라, 전 세계 칩 공장의 확장 속도를 재는 온도계에 가깝습니다.
그 온도계가 이번 분기에 사상 최고를 가리켰습니다. ASML의 3분기 총매출은 116억 6,200만 유로로 회사 역사상 가장 많았고, 새로 판매한 노광 시스템은 113대로 2분기의 86대에서 크게 늘었습니다. 이미 팔린 장비를 유지·보수하고 성능을 올려 주는 설치기반 관리 매출도 32억 8,900만 유로로 회사 전망을 웃돌았는데, 회사는 이 서비스 매출이 이익률을 전망 구간보다 위로 끌어올린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매출총이익률은 57.5%를 기록했습니다. 순이익 49억 6,000만 유로도 크게 늘었지만, 순이익에는 투자 지분의 평가 이익이 일부 섞여 있다는 보도가 있는 만큼, 이번 실적의 온도는 이익보다 매출과 판매 대수, 서비스 매출로 읽는 편이 정확합니다.
EUV 장비가 왜 이렇게까지 귀한지도 짚어 볼 만합니다. 이 기계는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한 상용 기계 중 하나로 꼽힙니다. 빛을 만들어 회로를 새기는 과정에 수많은 협력사의 정밀 부품이 들어가고, 한 대가 완성돼 공장에 설치되고 안정적으로 돌아가기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설치기반 관리 매출이 분기마다 30억 유로를 넘는다는 사실은 다른 각도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전 세계 공장에 깔린 ASML 기계가 그만큼 많고, 그 기계들이 쉬지 않고 돌아가며 유지와 성능 향상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파는 기계도 모자라고, 깔린 기계를 돌보는 일도 계속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숫자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회장이 꺼낸 시간표였습니다. ASML은 고객들이 인공지능 관련 투자의 규모와 기간에 대한 전망을 올리면서 장비 수요 전망도 함께 높아졌고, 일부 고객은 2029년과 2030년의 주문 의향까지 이미 표시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2029년과 2030년의 주문은 확정된 계약이 아니라 의향을 표시한 단계입니다. 그럼에도 의미가 가볍지 않은 이유는, 공장을 짓고 장비를 들이는 결정이 몇 년 단위로 움직이는 이 업계에서 고객들이 4년과 5년 뒤의 물량을 벌써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2027년과 2028년에 계획된 공급량이 수요에 못 미칠 것으로 보고, 추가 생산 능력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기계를 만드는 회사조차 기계를 더 만들 공장이 필요한 상황인 셈입니다.
이제 시선을 대만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TSMC는 ASML의 기계를 사들이는 가장 큰 고객 중 하나이자, 세계 첨단 칩 생산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파운드리 회사입니다. 기계 회사가 '주문이 밀린다'고 말할 때, 그 주문을 넣고 실제로 칩을 찍어 내는 쪽의 성적은 어땠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공장 쪽도 기록적이었습니다. TSMC의 3분기 매출은 467억 2,000만 달러로 회사가 제시했던 전망의 상단을 넘어섰고, 순이익은 7,630억 6,000만 대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분기보다 68.7% 늘었습니다. 시장이 예상하던 약 7,463억 대만달러도 웃돈 결과입니다.
이익의 질을 보여 주는 숫자들도 탄탄했습니다. 매출총이익률은 66.4%로 회사가 제시한 65%에서 67% 사이의 전망 구간 안에 들었고, 영업이익률은 58.7%로 전망 구간의 상단을 넘어섰습니다. 다만 매출총이익률이 2분기의 67.7%보다는 조금 내려왔는데, 이 하락을 두고 2나노 양산 초기의 비용 부담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 해석은 회사의 발표가 아니라 시장 분석의 시각이라는 점은 구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회사 발표 자료가 확인해 주는 것은 수치 그 자체와, 첨단 공정 수요가 실적을 받쳤다는 경영진의 설명까지입니다.
공정별 매출 구성을 보면 지금 칩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또렷해집니다. 웨이퍼 매출에서 가장 앞선 2나노 공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8%로, 2분기의 3%에서 빠르게 뛰었습니다. 3나노가 33%, 5나노가 28%, 7나노가 10%를 차지해 7나노 이하 첨단 공정을 모두 합치면 79%에 이릅니다. 2나노는 이제 막 양산이 본격화되는 세대입니다. 가장 비싸고 가장 만들기 어려운 칩의 비중이 분기마다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것은, 인공지능 칩 수요가 구형 공장의 여유 공간이 아니라 최첨단 라인의 증설로만 감당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음 분기 전망은 이 그림에 마지막 점을 찍습니다. TSMC는 4분기 매출 전망을 523억 달러에서 543억 달러로 제시했습니다. 3분기의 467억 달러에서 다시 크게 뛰는 숫자입니다. 이익률 전망 구간도 65%에서 67%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회사 재무책임자는 3분기 실적이 첨단 공정 수요에 힘입은 것이며, 4분기에도 2나노의 빠른 양산 확대를 포함한 첨단 수요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공장이 기록을 세운 직후에 스스로 전망을 더 올리는 모습은, 적어도 올해 안에는 수요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두 회사의 발표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칩을 만드는 기계도 부족하고, 그 기계로 칩을 찍는 공장도 부족합니다. 기계 회사는 2030년 주문 의향을 이야기하고, 공장 회사는 분기마다 전망을 올립니다. 병목이 칩 설계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물리적인 장비와 공장의 속도에서 생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장을 짓는 데는 수년이 걸리고, EUV 장비 한 대를 만드는 데도 수많은 협력사의 부품이 제때 모여야 합니다. 수요는 분기 단위로 뛰는데 공급은 연 단위로 움직이니, 간격이 빠르게 메워지지 않는 구조입니다.
공급이 왜 연 단위로만 움직이는지도 이 구조에서 설명됩니다. 반도체 공장은 짓는 데만 수년이 걸리고, 장비가 도착한 뒤에도 설치와 조정, 생산 수율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장비 한 대가 늦어지면 공장 전체의 일정이 밀리고, 공장 한 곳이 늦어지면 그 공장에 칩을 맡긴 설계 회사들의 출시 일정까지 흔들립니다. 그래서 이 업계의 계획은 분기가 아니라 연 단위로 짜이고, 고객들이 2029년과 2030년의 물량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수요의 속도와 공급의 속도가 서로 다른 시계로 움직이는 한, 병목은 일시적인 뉴스가 아니라 상수에 가깝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과도 멀지 않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ASML의 핵심 고객으로 EUV 장비 확보에 나서 왔고, 인공지능 메모리 수요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ASML의 장비 배정과 TSMC의 증설 속도는 한국의 반도체 일정에도 그대로 영향을 줍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를 만드는 회사와, 그 기계로 세계의 칩을 찍는 공장이 동시에 '모자라다'고 말하는 풍경은 그래서 남의 나라 실적 발표로만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 확인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ASML이 검토 중이라는 추가 생산 능력이 실제 증설 발표로 이어지는지, TSMC가 다음 실적에서 설비투자 방향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그리고 2나노 비중이 분기마다 얼마나 빠르게 늘어나는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움직이는 속도가 곧 인공지능 칩 병목이 풀리는 속도입니다. 2030년이라는 숫자가 말해 주는 것은 단순합니다. 이 경쟁은 아직 초반이라는 것입니다.
출처: ASML 2026년 3분기 실적 보도자료(GlobeNewswire, 2026년 10월 14일), TSMC 2026년 3분기 실적 보도자료(2026년 10월 15일, 순이익 기대치는 LSEG 추정을 Reuters가 전한 값). 2029년·2030년 주문은 고객의 의향 표시 단계이며 확정 수주가 아닙니다. 2027년·2028년 공급 부족 전망과 추가 생산 능력 검토는 관련 보도를 근거로 했고, 매출총이익률 하락의 원인 해석은 시장 분석 보도에 따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