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은 1000조 분의 1초, 저장은 10억 분의 1초 — 양자 배터리의 빛과 그림자
배터리는 커지면 느려집니다. 용량이 큰 전기차가 충전기에 오래 꽂혀 있는 이유이고, 보조배터리가 클수록 완충이 늦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배터리가 있습니다. 커질수록 오히려 빨리 충전되는 배터리, 양자 배터리입니다. 말로만 존재하던 이 개념이 올해 3월, 처음으로 충전부터 방전까지 한 사이클이 도는 시제품으로 나왔습니다.
일반 배터리는 화학 반응으로 에너지를 저장합니다. 충전할 때는 이온이 전극 사이를 천천히 이동해야 하고, 셀을 늘리면 그만큼 채울 것도 늘어납니다. 출력을 무리하게 높이면 열이 나고 수명이 닳아요. 양자 배터리는 저장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양자 상태를 이용해 에너지를 담는데, 핵심은 '초흡수'라는 현상입니다. 분자 여러 개가 각자 따로 빛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양자 중첩으로 묶여 하나의 집단처럼 동시에 흡수하는 거예요. 합창단 전원이 각자 연습하는 게 아니라 한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단위가 늘어나면 충전 시간은 대략 그 수의 제곱근에 반비례해 줄어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혼자서 물을 받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한꺼번에 받는 구조라, 규모가 커질수록 오히려 유리해지는 셈입니다.
이름부터 짚고 가면, 양자 배터리는 양자 컴퓨터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물건은 아닙니다. 컴퓨터든 배터리든 '양자역학의 효과를 쓴다'는 데서 이름이 온 것이고, 이 배터리가 노리는 것도 계산이 아니라 에너지의 저장과 전달입니다. 헷갈리기 쉬운 이름과 달리, 경쟁 상대는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리튬이온 배터리예요.
개념 자체는 2013년에 나왔습니다. 폴란드 그단스크 대학의 로버트 알리츠키와 벨기에 루벤 대학의 마크 파네스, 두 이론물리학자가 양자 셀 여럿을 얽히게 만들면 저장된 에너지 중에서 실제로 꺼내 쓸 수 있는 몫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놨어요. 다만 그 뒤로도 10년 넘게 양자 배터리는 종이 위에만 있었습니다. 원리를 실제 소자로 옮기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가 장난이 아니라는 건 2022년에 처음 실험으로 확인됐습니다.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의 제임스 콰치 박사 연구팀은 거울 사이에 유기 분자를 넣은 얇은 소자를 여러 크기로 만들어 레이저로 충전해 봤습니다. 거울도 평범한 거울이 아니라, 유전체 물질을 번갈아 쌓아 빛을 오래 가두도록 만든 특수 거울이었습니다. 소자가 커지고 분자 수가 늘수록 충전 시간이 실제로 줄어들었어요.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이 결과는 초흡수의 증명으로 불렸습니다. 다만 그때는 에너지를 흡수해 담는 것까지였고, 담긴 에너지를 전기로 꺼내 쓰는 단계는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올해 3월, 호주 국가 과학기관 CSIRO와 RMIT 대학, 멜버른 대학 연구팀이 그 다음 칸을 채웠습니다. 동전 크기의 시제품은 거울 두 장이 약 100나노미터 간격으로 마주 본 구조이고, 그 사이에 유기 분자 층이 들어갑니다. 레이저 빛이 이 좁은 공간에 갇히면 빛과 분자가 강하게 결합한 상태가 되고, 분자들이 집단으로 반응해 에너지를 흡수해요. 이번 시제품의 진짜 진전은 충전 뒤에, 저장된 에너지를 전류로 꺼내는 것까지 보여 줬다는 데 있습니다. 학술지 'Light: Science & Applications'에 발표된 이 장치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작동한 양자 배터리로 소개됐습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상온에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초전도 물질을 쓰는 다른 방식은 영하 150도 아래의 극저온이 필요해서, 일상 기기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거든요.
다만 숫자를 보면 왜 아직 '배터리'라고 부르기 이른지 보입니다. 충전은 펨토초, 즉 1000조 분의 1초 단위로 일어나지만, 에너지를 붙잡아 두는 시간은 나노초, 10억 분의 1초 단위입니다. 충전보다 백만 배쯤 길다고는 해도,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과는 거리가 멀어요. 담을 수 있는 에너지양도 수십억 전자볼트 수준으로, 스마트폰 배터리는커녕 작은 센서 하나를 오래 돌리기에도 턱없이 적습니다. 연구팀 스스로도 다음 과제를 유지 시간 연장과 저장량 확대라고 말합니다.
두 배터리의 차이를 정리하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저장 방식이 화학 반응이냐 양자 상태냐. 둘째, 크기와의 관계가 정반대라서, 일반 배터리는 커질수록 충전이 느려지고 양자 배터리는 빨라집니다. 셋째, 유지 시간은 지금으로선 비교 자체가 무색할 만큼 일반 배터리가 깁니다. 넷째, 동작 온도는 방식마다 갈리는데, 최소한 이번 시제품은 상온에서 돌아간다는 점이 강점입니다. 결국 양자 배터리는 '더 큰 배터리'가 아니라 '다르게 동작하는 배터리'로 보는 게 정확합니다.
외부 전문가들의 평가도 냉정합니다. 이탈리아 제노바 대학의 다리오 페라로 교수는 양자 배터리의 목적이 저장 용량을 키우는 게 아니라 에너지 전달의 속도와 제어에 있다며, 활약 무대는 결국 양자 규모의 세계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퀸스 대학 벨파스트의 마우로 파테르노스트로 교수도 원리 시연으로는 훌륭하지만, 담긴 에너지를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해 꺼내는 일이 쉽지 않다고 짚었습니다. 스마트폰과 전기차를 대체할 물건이 아니라, 양자 컴퓨터 같은 양자 장비 안에서 쓸 특수 전원에 가깝다는 게 현재의 무게중심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양자 프로세서나 센서는 일반 전원에서 나오는 미세한 전기 잡음에도 상태가 깨지기 쉬워서, 양자 세계 안에서 조용히 에너지를 주고받는 전원이 따로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야가 꼽는 첫 번째 무대는 가전제품이 아니라 양자 칩 위입니다. 연구팀이 먼 미래의 응용으로 전기차 초고속 충전이나 무선 전력을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목표로서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에는 이 분야의 열기에 물리학이 직접 제동을 거는 논문도 나왔습니다. 핀란드와 독일, 스페인, 인도의 국제 연구팀이 학술지 'PRX Quantum'에 발표한 이론 연구는, 집단 효과로 충전 출력을 키우는 설계라면 어떤 방식이든 출력이 출렁이는 폭이 평균 출력보다 더 빨리 커질 수밖에 없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빠르게 충전되는 그 성질과 안정적으로 내보내는 성질은 한 몸에 같이 있기 어렵다는 뜻이에요. 규모를 키울수록 빨라진다는 장점의 뒷면에, 규모를 키울수록 다루기 어려워진다는 대가가 붙어 있는 셈입니다. 3월의 시제품이 보여 준 이득이 진짜인 만큼, 치러야 할 대가도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 법칙의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남은 과제를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지 시간입니다. 나노초에서 출발해 최소한 마이크로초, 밀리초 단위로는 올라가야 '담아 둔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둘째는 저장량입니다. 지금의 수십억 전자볼트에서 실제 회로를 돌릴 수준까지 가려면 재료를 쌓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셋째는 제어입니다. 담는 것만큼이나,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만큼 꺼내는 일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에요. 이 세 칸은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를 무리하게 키우면 다른 하나가 무너지는 구조입니다. 9월의 이론 논문이 말한 트레이드오프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연구팀이 준비하는 다음 수는 두 가지입니다. 양자 층으로 빠르게 충전하고 일반 층으로 오래 저장하는 하이브리드 구조, 그리고 작은 양자 배터리 여러 개를 연결하는 방식이에요. '커질수록 빨라지는' 성질이 사실이라면, 여러 개를 연결해 키우는 길 자체가 이 기술의 전략이 됩니다. 콰치 박사는 이 두 가지가 되면 일반 기기를 돌리는 길에 들어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양자 배터리를 둘러싼 과장된 제목들은 대부분 이 '되면'을 지우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 진전은 느리지만 분명합니다. 2022년에 흡수를 증명했고, 2026년에 꺼내 쓰는 것까지 보여 줬습니다. 다음 칸은 '오래 담는 것'입니다. 그 칸이 채워지는 날이 오면, 이 기술은 비로소 실험실 밖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자료 출처: CSIRO·RMIT 대학·멜버른 대학 연구팀 발표와 학술지 Light: Science & Applications 게재 내용(TechSpot 보도), 애들레이드 대학 2022년 Science Advances 논문 보도자료, PRX Quantum 이론 논문 관련 보도와 2013년 개념 제안 배경(TechTimes 해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