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램에 215페타바이트, 계산까지 하는 물질 DNA
시험관 속 작은 물방울 하나가 덧셈을 해냈습니다. 아일랜드 메이누스 대학 연구팀이 올해 9월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DNA 컴퓨터 이야기입니다. 재료는 번쩍이는 칩이 아니라 소금물에 녹인 DNA 가닥들이었고, 연구팀은 10 더하기 3이 13이라는 답을 분자들이 스스로 찾아내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왜 과학자들은 하필 생명체의 설계도인 DNA로 계산을 하려는 걸까요.
이유가 없는 시도는 아닙니다. 지금의 컴퓨터는 두 가지 벽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반도체 회로는 2나노미터 수준까지 좁아져 물리적인 한계가 거론되는 중이고, 전 세계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력도 해마다 불어납니다. 이번 연구를 이끈 데이미언 우즈 교수는 아일랜드 전력의 23퍼센트가 컴퓨팅과 데이터 저장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전기를 덜 먹고 더 작게 쌓을 수 있는 계산 방식을 찾다 보니, 과학자들의 눈이 30억 년 넘게 정보를 다뤄 온 물질인 DNA로 향한 것입니다.
DNA가 계산하는 방식은 전자회로와 완전히 다릅니다. DNA는 A, T, C, G 네 글자의 배열로 정보를 적는 물질이고, A는 T와, C는 G와 꼭 맞는 짝으로만 붙는 성질이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짝짓기를 규칙으로 바꿔서 분자들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과정 자체가 계산이 되도록 설계합니다. 물방울 하나에는 수십억 개에서 수조 개의 가닥이 들어 있어서, 수많은 후보가 동시에 경쟁하는 거대한 병렬 계산이 일어납니다. 하나씩 순서대로 따지는 컴퓨터와는 출발점부터 다른 셈입니다.
답을 읽어 내는 방식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계산이 끝난 자리의 분자 구조에 따라 형광 신호가 켜지거나 꺼지도록 만들어 두고, 그 빛의 패턴을 읽으면 그것이 곧 계산 결과입니다. 전자가 회로를 달리는 대신 분자가 자리를 찾는 것이 계산이고, 빛으로 그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 출력인 셈입니다. 얼핏 보면 느리고 번거로운 방식이지만, 이 느림 뒤에는 실리콘 컴퓨터가 흉내 내기 어려운 규모의 동시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이 발상의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캘리포니아 대학의 레너드 애들먼 교수는 도시 일곱 곳을 모두 한 번씩 지나는 경로를 찾는 문제를 DNA로 풀어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했습니다. 도시마다 서로 다른 DNA 가닥을 부여해 시험관에서 섞자 가능한 경로들이 한꺼번에 만들어졌고, 그중에서 정답만 골라내는 데는 일주일쯤 걸렸다고 합니다. 참고로 애들먼은 오늘날 인터넷 보안의 바탕이 된 RSA 암호에서 머리글자 A를 맡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애들먼의 방식은 정답이 아닌 가닥들을 체로 거르듯 계속 버려 나가는 방식이었고, 한 번 쓰고 나면 실험은 끝이었습니다.
이후 연구는 후보를 한꺼번에 다루는 규모를 키우는 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애들먼 연구팀은 2000년대 초반 변수 20개짜리 논리 문제에서 100만 개가 넘는 후보 해법을 DNA로 한 번에 다루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전자 컴퓨터가 후보를 하나씩 대입해 보는 동안, 시험관 속 분자들은 이미 전부 동시에 답을 찾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압도적인 병렬성이 DNA 계산이 30년 동안 연구자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이유입니다.
DNA가 먼저 두각을 나타낸 곳은 계산보다 저장이었습니다. 2012년 하버드 연구팀이 책 한 권 분량인 5.27메가비트를 DNA에 적어 넣었고, 2017년에는 컬럼비아 대학 연구팀이 운영체제와 영화,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파일들을 DNA에 저장해 오류 하나 없이 되읽어 냈습니다. 200개 염기 길이의 가닥 72,000개에 나눠 담은 기록이었고, 복제 과정을 거친 사본에서도 오류가 없었습니다. 이때 연구팀이 밝힌 저장 밀도가 1그램에 215페타바이트였습니다. 단순히 환산하면 1킬로그램의 DNA에 215엑사바이트를 담는 셈이니, 시험관 하나가 데이터센터 건물과 맞먹는 그림이 됩니다. 자연이 만든 저장장치의 밀도는 지금의 어떤 반도체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올해 네이처 논문이 주목받은 이유는 저장된 DNA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연구팀 방식의 핵심은 정답이 되는 분자 구조가 에너지 면에서 가장 안정한 상태가 되도록 설계한 데 있습니다. 보통의 컴퓨터는 답이 틀어지지 않도록 계속 전력을 쓰면서 감시하는데, 이 컴퓨터는 경사진 바닥에서 공이 가장 낮은 곳으로 굴러가 멈추듯 가만히 두면 정답에 도달합니다. 1994년의 '거르기'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답이 아닌 구조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서, 별도의 오류 정정 장치를 달지 않아도 결과가 유지됩니다.
연구팀은 덧셈과 곱셈, 짝수와 홀수 판정, 그래프에서 길이 이어지는지 찾는 문제까지 열 가지 프로그램을 돌렸고 정확도는 평균 95퍼센트에서 97퍼센트 사이였습니다. 조건을 빠르게 몰아붙이면 30초 안에 답이 나왔고, 쓴 DNA에 새 입력을 넣어 다시 계산하는 재사용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연구팀은 700회가 넘는 실험을 거쳤고, 말려 두었던 시료를 15개월이 지나 물만 다시 넣어 깨웠더니 계산이 재개됐다고 합니다. 이 연구는 저장과 계산을 DNA로 함께 하려는 유럽의 장기 프로젝트 안에 있고, 유럽혁신위원회가 약 400만 유로를 지원했습니다. 독일의 DNA 합성 기업과 프랑스의 실험 자동화 소프트웨어 기업이 파트너로 참여해, 논문 속 아이디어를 실제 장치로 옮기는 작업이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럽이 이 분야에 돈을 대는 데는 계산 너머의 그림이 있습니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데이터가 쌓일수록 저장장치와 전력이 함께 늘어납니다. 그런데 데이터가 DNA에 저장돼 있다면, 그 데이터를 굳이 전자 컴퓨터로 읽어 옮기지 않고 저장된 자리에서 바로 계산까지 끝낼 수 있습니다. 우즈 교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1기가바이트가 넘는 DNA가 들어 있습니다. 저장과 계산이 한 물질에서 만나는 그림, 그것이 이 프로젝트가 그리는 방향입니다.
다만 발표 문구와 논문 사이에는 간극이 있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 발표는 최대 100비트 규모의 계산을 앞세우지만, 논문이 꼼꼼하게 검증한 실험은 아직 작은 규모의 프로그램들이고, 구조를 열한 자리까지 키운 실험에서는 정확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연구를 수행한 아베르 에슈라 박사도 이 컴퓨터가 실리콘보다 빠르지는 않고 그럴 의도도 없다고 말합니다. 큰 덧셈 한 번에 최대 14시간이 걸렸다는 대학 발표의 수치만 봐도, 이 기계의 가치는 속도에 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방향의 연구가 나왔습니다. 올해 4월 KAIST 최영재 교수 연구팀은 신호를 받아 계산하는 DNA 바이오 트랜지스터를 만들어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습니다. 기존의 DNA 회로는 한 번 반응하면 그대로 끝나 버리는 일회용이었는데, 이 회로는 초기화 없이 계속 입력을 처리하면서 앞선 결과를 분자 구조에 기억까지 합니다. 연산과 저장을 한 몸에서 해낸 셈입니다. DNA의 염기 사이 간격이 0.34나노미터에 불과하다는 점이 이런 초소형 회로의 바탕이 됩니다. 연구팀은 몸속에서 질병 신호를 읽어 내는 일 같은 바이오와 의료 분야를 응용 방향으로 꼽았습니다.
저장 쪽에서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홍콩 대학 연구팀은 손상된 DNA에서 원본을 되살리는 오류 정정 기술 '궁니르'를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습니다. 오류율이 20퍼센트까지 올라간 상태에서도 복원이 되는데, 이는 기존 방식보다 네 배쯤 강한 수준입니다. 연구팀은 약 400년이 지난 수준으로 손상된 DNA에서도 파일을 손실 없이 되살렸고, DNA 저장장치의 실용 수명이 10년이 채 안 되는 수준에서 수백 년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DNA는 조건만 맞으면 수천 년을 버티고, 보관하는 동안에는 전력을 전혀 쓰지 않는 저장 매체입니다. 테이프나 하드디스크가 길어야 수십 년 단위로 교체를 걱정해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수명에서 자릿수 자체가 다른 매체인 셈입니다.
큰 기업들의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2019년 마이크로소프트와 워싱턴 대학 연구팀은 DNA에 데이터를 쓰고 읽는 전 과정을 자동화한 첫 시스템을 선보였습니다. 자동으로 저장하고 되읽은 단어는 'hello' 다섯 글자였고, 거기에 21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보면 소박한 기록이지만, 사람의 손을 떠나 기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해냈다는 점에서 연구실 기술을 데이터센터로 끌고 가려는 시도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창고만 한 데이터센터의 정보를 주사위 몇 개 크기에 담겠다는 것이 이 팀이 내건 그림이었습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분명합니다. 첫째는 속도입니다. 분자의 반응은 초 단위에서 시간 단위로 움직여서, 1초에 수십억 번을 계산하는 반도체와는 애초에 겨루는 종목이 다릅니다. 둘째는 비용입니다. 원하는 서열의 DNA를 합성하고 결과를 읽어 내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이 아직 큽니다. 셋째는 규모입니다. 실험이 커질수록 정확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 올해 논문에서도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이 기술을 소개하는 글에서 흔히 보는 '반도체를 대체할 컴퓨터' 같은 표현은 아직 이릅니다.
쓰고 읽는 과정 자체가 화학 공정이라는 점도 현실적인 벽입니다. 데이터를 DNA에 적으려면 서열을 한 글자씩 합성해야 하고, 읽으려면 염기서열 분석을 거쳐야 합니다. 2017년의 저장 실험에서는 가닥 72,000개를 합성하는 데만 2주쯤 걸렸다고 전해집니다. 반도체는 전자를 밀어 넣고 빼는 일이 순식간이지만, 분자 컴퓨터의 입출력은 실험실의 일정을 따라 움직입니다. 이 간격이 좁혀지지 않으면 DNA 컴퓨터는 연구실 바깥으로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DNA 컴퓨터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노트북을 대신하는 자리는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수백 년을 보관해야 하는 인류의 기록 보관소처럼 느려도 괜찮고 오래가는 것이 중요한 곳, 그리고 몸속처럼 전자칩이 들어가기 어려운 환경에서 질병의 신호를 읽어 내는 일처럼 작고 젖은 환경이 오히려 유리한 곳이 먼저 거론됩니다. 메이누스 연구팀도 세포 안에서 작동하며 질병의 징후를 감지하는 분자 시스템을 응용 후보로 꼽았고, KAIST 연구팀 역시 의료 분야를 향하고 있습니다. 느리지만 엄청나게 병렬적이고, 전력을 거의 쓰지 않으며, 믿기 어려울 만큼 오래가는 계산. 실리콘 컴퓨터가 잘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DNA 컴퓨터의 몫이 있습니다.
1994년의 시험관 실험은 당시에도 화제였지만, 오랫동안 '재미있는 가능성'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올해, 계산하는 DNA와 기억하는 DNA, 그리고 수백 년을 버티는 DNA 저장이 같은 해의 저널들에 나란히 실렸습니다. 실리콘의 시대가 끝나서가 아니라, 실리콘만으로는 부족한 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물방울 속 컴퓨터가 일상으로 내려오기까지는 먼 길이 남았지만, 방향 하나는 분명해졌습니다. 컴퓨터의 재료가 반드시 딱딱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출처
- Stérin 외, '열역학적으로 유리한 분자 컴퓨터(A thermodynamically favoured molecular computer)', Nature 657호, 2026년, doi.org/10.1038/s41586-026-10996-5
- 메이누스 대학 연구 발표 자료와 TechXplore 등 보도, 2026년 9월 (100비트 규모, 14시간, 재사용 횟수, 15개월 재활성화 등 대학 발표와 보도 기준 수치는 본문에 귀속을 표시함)
- Sim 외, '리셋 없는 DNA 논리 회로(Reset-free DNA logic circuits for real-time input processing and memory)', Science Advances, 2026년, doi.org/10.1126/sciadv.aeb1699, KAIST 연구 소개 (Phys.org, 2026년 4월)
- Zhang 외, '궁니르 코덱(Gungnir codec enabling high error-tolerance and low-redundancy DNA storage)', Nature Communications, 2026년, doi.org/10.1038/s41467-026-71485-x, 홍콩 대학 발표 자료
- Adleman, '조합 문제 해법의 분자 계산(Molecular computation of solutions to combinatorial problems)', Science, 1994년
- Church 외, '차세대 디지털 정보 저장을 DNA에 인코딩', Science, 2012년
- Erlich & Zielinski, 'DNA 파운틴(DNA Fountain enables a robust and efficient storage architecture)', Science, 2017년
- 워싱턴 대학·마이크로소프트 연구팀, '완전 자동화된 DNA 데이터 저장 시스템 실증', Scientific Reports, 2019년 (Phys.org 보도, 2019년 3월)
